“동정은 필요 없습니다. 저희는 프로페셔널 예술인입니다. 연민의 마음으로 마지못해 오실 필요는 없습니다.”

또박또박 잘라말하는 여인은 이현아(26)씨다. 관현맹인전통예술단에서 정가(正歌)를 부른다. 정가는 가곡·가사·시조를 말한다. 한마디로 창을 하는 예인이다. 미숙아로 태어난 그는 세 차례 눈 수술을 받으면서 빛과 아주 짧게 만났다가 곧 세상의 빛과 영원히 이별한 시각장애인이다. 중앙대 음대 국악과를 졸업한 그는 2010년 동아콩쿠르 일반부 정가 부문에서 은상을 탄 국악재원이다.

가야금을 뜯으면서 노래를 부르는(병창·竝唱) 이민정(28)씨는 목원대 출신이다. 그는 2007년 전국 김해가야금대회 병창부문에서 금상을 받았다. “관객들의 마음에 울림을 주는 연주자로 살고자합니다. 이런 과정에서 사회의 음지에서 불행하게 사는 이들에게 희망을 전파하고 싶습니다.”

이들을 비롯한 총 23명의 예술단은 1일(토) 오후 7시 본한인장로교회(더프린/하이웨이7)에서 캐나다한인들을 위해 첫 연주회를 갖는다. 연주자는 8명이지만 레퍼토리는 다양하다. 국악뿐 아니라 동요, 성가메들리(노래들을 연속해서 부르는 양식), 타악 합주, 민요 등도 있으니 단순히 국악연주라고만 할 수는 없다. 앙코르에 대비해 ‘아리랑’과 ‘어메이징 그레이스’도 준비했다. 국악바탕의 시각장애 예술인들이 부르는 ‘어메이징 그레이스’, 과연 어떨지 궁금하다.

출연자 모두가 국악과 출신으로 유명 콩쿠르에서 1·2등을 다툰 정예 국악인들이다. 이들의 삶은 어려서부터 고단했다. 오늘의 예술인이 되기까지 고통과 좌절의 문턱을 한두 번 만난 게 아니다.

현아씨는 초등학교 3학년 때부터 시조창을 시작했다. 다니던 국립 서울맹학교엔 국악과목이 없어 따로 개인레슨을 받았다. 국악전문 중고교 입학을 원했지만 장애인이라는 이유로 여러 번 거절당했다. 그때마다 어머니는 그녀의 눈물을 닦아주었다. 현아씨의 아픔은 어머니의 아픔이었다. 세상을 못 보는 것이 자신의 잘못인 듯 늘 딸의 주변에서 손발이 돼주었다. 대학진학을 앞둔 그녀는 또 한번 장벽을 만났다. 국악과가 있는 대학들은 그녀의 원서조차 받아주지 않았다. 장애인용 시설도, 선생도, 점자책도 없을 뿐더러 다른 학생들에게 큰 지장이 된다는 것이었다.

국악을 포기하지 않을 수 없는 벼랑 끝에 섰을 때 기회가 노크했다. 라디오에서 현아씨의 노래를 들은 중앙대 국악과에서 그의 원서를 받아주기로 한 것. 얼마 후 그는 비장애인들과 7-1의 입학경쟁을 벌이는 자신을 발견했다. 겁이 났다. 내가 어떻게 눈뜬 이들을 이길까. 그러나 놀랍게도 입학이 허용됐을 때 그는 장애인도 장벽 없이 생활할 수 있는 세상이 왔다고 믿었다.

다행히 그가 정가를 배우는 시간은 다른 학생들보다 빨랐다. 맹인용 점자악보가 시원찮아 선생님이 부르는 노래를 빠짐없이 녹음했다. 그걸 들으며 머릿속에 악보를 거꾸로 새겨 넣었다. 이런 방식으로 1주일이면 한 곡을 마스터했다. 비장애인 학생들은 무려 6개월 이상이 걸렸으니 장애가 지장이 아니었다. 장애라는 불행이 행복으로 바뀐 4년이 후딱 지나가 졸업을 앞둔 2011년 초 그는 다시 다가온 장애의 장벽 앞에서 모진 운명을 원망했다.

그가 취업할 곳은 아무 곳도 없었다. ‘아아, 역시 나는 장애인. 대학까지 졸업했지만 나는 안마사를 면할 수 없는 운명인가 보다’. 비참한 가슴을 쓸어내리며 안마사 자격준비를 하던 그에게 또 한번 기적이 손짓했다. 맹인만의 예술단 창단을 준비하던 실로암장애인복지관(관장 김선태 목사)에서 구애의 손길이 온 것이다. 혼신의 힘을 쏟아 엘리트 코스를 밟아온 젊은 국악인은 드디어 예술단의 핵심 멤버가 됐고 그 덕에 우리는 ‘서편제’의 ‘송화’를 닮은 그그의 창을 토론토에서 듣게 된 것이다.

“그날 가야금을 팔아버렸습니다. 연주 때 입는 한복 열 벌도 함께 정리했죠.” 가야금병창 이민정씨의 말이다.

그는 고등학교 때부터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10년 가까이 국악을 배웠다. 이제 그런 국악과 이별하는 마당이었다. 너무 심란해서 눈물도 나오지 않았다. 아르바이트로 학비를 버느라고 하루 4시간도 못 자고 뛴 대학시절이 억울했다. 악착같이 공부한 덕에 김해에서 열린 전국 가야금대회에서 최우수상을 탔지만 2008년 대학을 졸업해도 받아주는 곳은 없었다. 그래서 다 팔아버린 것이었다.

태어날 때부터 앞을 못 본 그녀는 어려서부터 노래를 잘 불러 동네방네 불려다녔단다. 고교입학 직전 TV에서 흘러나온 판소리 한 대목은 눈물이 날 정도의 떨림과 가슴이 쿵 내려앉는 설렘을 주었다. 그후부터 국악에 빠져들었다. 친구들이 가요를 흥얼거리고 다닐 때 민정씨는 판소리 대목을 외우고 다녔다. 그렇게 해서 가야금병창으로 목원대에 진학했다. 맹학교 시절과 달리 대학은 쉽지 않았다. 학생들은 모두 비장애인들이었고 일부는 초등학교 때부터 국악을 접했으니 경쟁상대로는 버거웠다. 심한 약시였던 민정씨는 악보를 읽으려면 확대경이 필요했다. 남보다 두세 배 시간이 더 걸렸다. 대양 가운데 있는 외딴 섬에 달랑 떨어진 소외감이 엄습했다. 집안 형편상 학비, 생활비, 레슨비를 벌어야 했다. 다행히 맹학교 때 받은 안마사 자격으로 매일 밤 9시부터 새벽까지 아르바이트를 했다. 그러면서 죽기로 공부에 매달렸다. 그러나 대회에 나가면 번번이 떨어졌다. 그러다가 대학졸업반 때 김해 대회서 우승했을 때는 “기쁘다는 말로는 심정을 다 표현할 길이 없었다”고 그는 회상한다. 고생은 끝나고 인생에서 성공한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깐. 더 큰 시련은 졸업 후 찾아왔다. 친구들은 졸업하면서 각종 국악단에 들어가거나 학교 강사로 채용됐지만 민정씨는 원서조차 제대로 내보지 못했다. 그래도 음악에 매달리면서 6개월을 버텼다. ‘1등한 날 데려가는 단체가 반드시 나타날 것’이라고 자위하면서. 그러나 그런 단체는 현실에 없었다. 민정씨는 부질없는 음악은 집어치우고 속기사 자격증을 따서 먹고살자고 결심했다. 그렇게 좋아했던 소리와 멀어졌다.

2010년 가을 그는 시각장애인만으로 된 국악예술단을 만든다는 소리를 들었다. 귀를 의심했다. 어떻게 그런 단체가 생겨 한국에? 만약 그게 사실이고 그곳에 채용된다면 고향 대구를 떠나 서울로 가서 살아야 하는 등의 현실적 문제가 가슴을 짓눌렀다. 결혼을 약속한 남자친구는 어떻게 하나. 그러나 남친은 용기를 주었다. “네 가슴을 뛰게 하는 일이라면 당연히 해야지.” 듬직한 권고였다.

2011년 2월 관현맹인전통예술단 오디션장에 갔을 때 그는 장애와 싸워온 국악인이 자기만이 아니라는 것을 처음 알았다. 위안이 됐다. “장애는 영원히 극복하지 못할 굴레라고 생각했는데 지금 저는 장애가 힘든 시간을 준 것만큼 공평하게 기회도 줬다고 생각합니다.” 누군가의 가슴에 남는 연주자가 되고 싶다는 민정씨의 말이다.